로마서 8:1-39

8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해 주는 영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육체로 인해 약하여+ 할 수 없던 일을+ 하느님께서 하셨습니다. 곧 죄를 없애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육체의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체 안에 있는 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 조건이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의 일에+ 정신을 쏟지만 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의 일에+ 정신을 쏟습니다.  육체에 정신을 쏟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영에 정신을 쏟는 것은 생명과 평화를 의미합니다.+  육체에 정신을 쏟는 것은 하느님과 적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으며, 사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육체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참으로 여러분 안에 머물면 여러분은 육체가 아니라 영을 따르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어 있어도 영은 의로움 때문에 여러분에게 생명을 줍니다. 11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그분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는 자신의 영을 통해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에게 의무가 있지만, 육체를 따라+ 살도록 육체에 대한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체를 따라 산다면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육체의 행위를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15  여러분은 다시 두려움을 갖게 하는 종살이의 영이 아니라 아들로 입양되게 하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 영으로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외칩니다.+ 16  바로 그 영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17  우리가 자녀라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입니다.+ 우리가 함께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 함께 고난을 당한다면+ 말입니다. 18  현재의 고난은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사실, 피조물은 간절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허무한 것에 복종하게 된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복종하게 하신 분에 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희망이+ 주어졌는데, 21  그 희망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계속 함께 신음하며 함께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23  그뿐만 아니라, 영을+ 첫 열매로 받은 우리 자신도 속으로 신음하면서,+ 대속물에 의해 우리 몸에서 놓여+ 아들로 입양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4  우리는 이 희망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닙니다. 어떤 것을 본다면, 그것을 희망하겠습니까? 25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희망하면,+ 우리는 인내하며 그것을 계속 간절히 기다립니다.+ 26  그와 같이 영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줍니다.+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있을 때에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르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신음하는 우리를 대신하여 바로 그 영이 탄원해 줍니다. 27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그 영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십니다. 영이 거룩한 자들을 위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게 탄원하기 때문입니다. 28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하느님께서 자신의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하게 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29  그분은 자신이 처음으로 주의를 기울이신 사람들이 자신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많은 형제+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30  그분이 미리 정하신 사람들은+ 또한 그분이 부르신 사람들이며,+ 그분이 부르신 사람들은 또한 그분이 의롭다고 인정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의롭다고 인정하신 사람들은 또한 그분이 영광스럽게 하신 사람들입니다.+ 31  그러므로 이 일들에 대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자신의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주신 분이+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기꺼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누가 고발하겠습니까?+ 그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일으켜지셔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탄원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겠습니까?+ 환난이나 고난이나 박해나 굶주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겠습니까?+ 36  “당신을 위해 우리가 온종일 죽임을 당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라고+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분을 통해 온전한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정부들도 현재 있는 것도 오게 될 것도 권세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각주

또는 “하지만 그것은 희망에 근거한 것인데, 피조물도 ···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연구 노트

율법 아래서 ··· 율법에 의해: 로마서에서 “법”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노모스)가 나오는 곳은 이 구절이 처음인데 이 단어는 이 구절에 두 번 나온다. 율법 없이에 해당하는 표현은 그리스어 아노모스이다. 이 문맥에서 노모스는 모세 율법을 가리키며, 로마서에서 대부분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노모스는 (1) 하나의 법 규정, (2)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 (3)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의 전체나 일부, (4) 법과 같이 지침이 되는 원칙을 가리킬 수 있다.—마 5:17; 요 10:34; 롬 8:2 연구 노트 참조.

영의 법 ··· 죄와 죽음의 법: 이 문맥에서 “법”이라는 표현은 모세 율법에 나오는 것과 같은 특정한 법이나 규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 표현은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 사람의 행동의 지침이 되는 원칙, 다시 말해 마치 법과 같이 사람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의미한다. (롬 2:1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의 영의 법 즉 강력한 영향력을, 죄와 죽음으로 인도하는 타락한 육체의 법 즉 강력한 영향력과 대조한다. 물론 아담의 후손은 모두 내면에서 그릇된 일을 하게 하는 “죄의 법”의 강력한 영향력을 느낀다. (롬 7:23) 하지만 그들은 육적인 욕망이 아니라, 긍정적인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하느님의 영의 법을 따르기로 선택할 수 있다.—롬 7:21-25.

육체로 인해 약하여: 여기서 “육체”는 모세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불완전한 육체를 가리킨다. 심지어 대제사장조차도 불완전했기 때문에 죄를 위한 적합한 희생을 바칠 수 없었다. 따라서 율법은 죄인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율법은 그 법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불완전한 사람들의 약함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다. (롬 7:21-25; 히 7:11, 28; 10:1-4) 그러한 의미에서 율법은 “육체로 인해 약했다”고 할 수 있다.

육체로는: “육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사르크스)는 여기서 친족 관계, 육적(지상의) 혈통을 의미하며 인간으로서 예수의 혈통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마리아는 유다 지파에 속해 있었으며 다윗의 후손이었으므로, 그의 아들인 예수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다고 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어머니의 혈통으로 볼 때 “다윗의 뿌리이고 그의 자손”이셨으므로 “조상 다윗의 왕좌”에 대한 혈통상의 권리를 가지고 계셨다. (계 22:16; 눅 1:32) 예수의 양아버지인 요셉도 다윗의 후손이었으므로 예수께서는 다윗의 왕좌에 대한 법적 권리도 가지고 계셨다.—마 1:1-16; 행 13:22, 23; 딤후 2:8; 계 5:5.

육체: 성경에서 “육체”(그리스어 사르크스)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죄나 불완전성과는 관계없이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요 1:14; 3:6; 17:2) 하지만 이 문맥에서와 같이 불완전하고 죄 많은 상태에 있는 인간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앞 장들에서 바울은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을 “[인간]의 몸에서 작용”하는 “죄의 욕망”과 연관 지었다. (롬 6:19; 7:5, 18, 25) 이어지는 구절들(롬 8:5-13)에서 그는 죄 많은 육체를 즉 하느님의 성령과 대조한다.—그리스어 사르크스가 다른 의미로 사용된 예를 보려면 롬 1:3 연구 노트; 롬 2:28 참조.

육체: 성경에서 “육체”(그리스어 사르크스)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죄나 불완전성과는 관계없이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요 1:14; 3:6; 17:2) 하지만 이 문맥에서와 같이 불완전하고 죄 많은 상태에 있는 인간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앞 장들에서 바울은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을 “[인간]의 몸에서 작용”하는 “죄의 욕망”과 연관 지었다. (롬 6:19; 7:5, 18, 25) 이어지는 구절들(롬 8:5-13)에서 그는 죄 많은 육체를 즉 하느님의 성령과 대조한다.—그리스어 사르크스가 다른 의미로 사용된 예를 보려면 롬 1:3 연구 노트; 롬 2:28 참조.

정신을 쏟지만 ··· 정신을 쏟습니다: 그리스어 동사 프로네오는 기본적으로 “생각하다; 특정한 방식으로 정신을 쏟다; 특정한 정신 태도를 갖다”를 의미한다. (마 16:23; 롬 12:3; 15:5) 이 문맥에서는 무언가에 정신을 쏟고, 집중하고, 어쩌면 그것을 얻기 위해 애쓰기까지 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이 그가 행동하고 살아가는 방식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 단어는 어떻게 사람이 육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삶의 방향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지를 잘 묘사한다. (이 문맥에서 육체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알아보려면 롬 8:4 연구 노트 참조) 한 학자는 이 동사를 사용해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의 태도를 묘사한 것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 사람들은 육체와 관련된 일들에 정신을 쏟는다. 다시 말해 그런 일들에 아주 관심이 많고, 그런 일들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매우 즐긴다.” 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영의 일에 정신을 쏟는 것에 대해 묘사한 경우에도 이 단어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울은 육체에 정신을 쏟는 사람들이 맞는 결과(“죽음”)와 영에 정신을 쏟는 사람들이 맞는 결과(“생명과 평화”)를 알려 준다.—롬 8:6.

육체: 성경에서 “육체”(그리스어 사르크스)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죄나 불완전성과는 관계없이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요 1:14; 3:6; 17:2) 하지만 이 문맥에서와 같이 불완전하고 죄 많은 상태에 있는 인간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앞 장들에서 바울은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을 “[인간]의 몸에서 작용”하는 “죄의 욕망”과 연관 지었다. (롬 6:19; 7:5, 18, 25) 이어지는 구절들(롬 8:5-13)에서 그는 죄 많은 육체를 즉 하느님의 성령과 대조한다.—그리스어 사르크스가 다른 의미로 사용된 예를 보려면 롬 1:3 연구 노트; 롬 2:28 참조.

정신을 쏟는 것: 이 표현은 그리스어 명사 프로네마를 번역한 것이다. 프로네마는 이 문맥에 세 번 나오는데, 이 구절에 두 번 나오고 롬 8:7에 한 번 나온다.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사고방식, 정신(정신 태도), ··· 목표, 열망, 애쓰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 단어는 사람의 생각만이 아니라 의지나 욕망까지도 포함하는 단어이다. 이 명사와 어근이 같은 동사 프로네오(앞 구절에 사용됨)는 “생각하다; 특정한 방식으로 정신을 쏟다; 특정한 정신 태도를 갖다”를 의미한다. (마 16:23; 롬 12:3; 15:5) 따라서 육체에 정신을 쏟는다는 것은 육적인 욕망이나 일상적인 것에 대한 욕망에 몰두하고 그러한 욕망이 생각을 지배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1 2:16. 롬 8:4 연구 노트 참조) 영에 정신을 쏟는다는 것은 생각과 욕망과 행동이 하느님의 영 즉 활동력의 영향을 받고 지배를 받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바: 그리스어로 음역한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세 번 나온다. (롬 8:15; 갈 4:6) 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아버지” 또는 “아버지여”이다. 이 단어는 한국어의 “아빠”가 지닌 친근함도 어느 정도 담고 있으면서 “아버지”라는 말이 지닌 위엄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격식을 차리지 않으면서도 존중심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이다. 이 말은 아이가 가장 먼저 배우는 말 가운데 하나였지만 고대 히브리어와 아람어 문헌에서는 성인인 아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아바”는 칭호라기보다는 애정이 담긴 호칭이었다. 예수께서 이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그분이 아버지와 서로 신뢰하는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아들로 입양되게 하는: 직역하면 “아들로 두게 하는”. 그리스어 휘오테시아. 그리스와 로마 세계에서는 “입양”이라는 개념이 잘 알려져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입양되는 사람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청소년이나 젊은 성인이었다. 일부 주인들은 종을 법적으로 입양하기 위해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었다고 한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였다. 바울은 입양의 개념을 사용해서, 하느님의 부르심과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갖게 되는 새로운 신분을 설명한다. 불완전한 아담의 후손 모두는 죄의 종이었으므로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질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의 대속 희생으로 인해 여호와께서 그들을 죄의 종 상태에서 해방시켜 아들로 입양하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로 삼으실 수 있게 되었다. (롬 8:14-17; 갈 4:1-7) 바울은 그처럼 입양된 자들과 여호와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아바, 아버지!”라고 외친다고 말한다. 종이 주인을 그처럼 친근한 표현으로 부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아바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누구를 아들로 입양할지 결정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 (엡 1:5) 그분은 그들을 영으로 기름부으시는 때부터 자신의 자녀로 인정하신다. (요 1:12, 13; 요1 3:1) 하지만 하늘 생명으로 부활되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가 되는 영예로운 일이 온전히 실현되려면, 그들은 지상에 사는 동안 충실을 증명해야 한다. (계 20:6; 21:7) 따라서 바울은 그들이 “대속물에 의해 우리 몸에서 놓여 아들로 입양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롬 8:23.

아바: 그리스어로 음역한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세 번 나온다. 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아버지” 또는 “아버지여”이다. 이 단어는 아들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애정이 담긴 호칭이었다. (막 14:36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이 단어를 이 구절과 갈 4:6에서 사용했는데, 두 경우 모두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영으로 출생한 아들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용했다. 그들은 이제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으므로 여호와를 “아바”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 표현은 종이 입양되지 않았다면 결코 주인에게 사용할 수 없는 호칭이었다. 따라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하느님의 종”인 동시에 사랑 많은 아버지의 집의 아들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성령에 의해 이러한 신분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된다.—롬 6:22; 고전 7:23.

바로 그 영이 우리의 영과 함께 ··· 증언합니다: 이 구절에는 “영”(프뉴마)에 해당하는 그리스어가 두 번 나오는데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용어 설명 “” 참조) “바로 그 영”이란 하느님의 성령 즉 활동력을 가리킨다. “우리의 영”이라는 표현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지배적인 정신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성령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지배적인 태도와 함께 증언하여, 그들이 하느님의 영감받은 말씀에서 하늘 희망에 관해 알려 주는 내용이 자신에게 적용된다고 느끼게 만든다.

피조물: 땅의 모든 피조물이 에덴에서 있었던 인간의 반역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 “피조물”은 인간 가족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오직 인간만이 죄와 죽음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간절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롬 5:12; 8:19)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간절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뭔가를 찾기 위해 목을 길게 빼는 모습이나 머리를 들고 열렬히 바라보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단어이다.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를 “하느님의 아들들”로 부른다. (롬 8:17) 그들이 “나타나는” 때는 그들이 영광스럽게 되어 하늘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통치한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때를 가리킨다. 그들은 약속된 “자손”의 (창 3:15) 이차적인 부분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악한 세상 제도를 멸망시키실 때 그 일에 참여할 것이다. (롬 16:20; 계 2:26, 27)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에 그들이 제사장으로 섬기면서 예수의 대속 희생의 혜택을 피조물 즉 인류에게 베풀 때 그들이 “나타나는” 일이 더 있게 될 것이다. 그때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일로 인해 인류는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롬 8:21; 계 7:9, 10, 14; 20:5; 22:1, 2.

허무한 것: 또는 “공허한 것; 헛된 것; 좌절”. 이 그리스어는 「칠십인역」에서 히브리어 헤벨(문자적으로 금방 사라지는 “입김”이나 “수증기”를 가리킴)을 번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히브리어는 전도서에 35회 이상 나오는데, “지극히 헛되다”나 “모든 것이 헛되다”와 같은 표현에 사용되었다. (전 1:2; 2:17; 3:19; 12:8) 전도서의 필자인 솔로몬은 때때로 이 단어를 “바람을 쫓아다니는 것”이라는 표현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했다. (전 1:14; 2:11) 이 구절(롬 8:20)에서 바울은 열심히 노력하지만 목표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가리켜 이 단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희망도 언급하는데, 그것은 피조물이 지금까지 복종해 온 “허무한 것”에서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희망이다.—롬 8:21.

복종하게 하신 분: 이 표현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탄이나 아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느님을 가리킨다. 아담과 하와는 불완전성과 죄와 죽음을 물려줄 수밖에 없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게도 그들이 자녀를 낳을 수 있게 허용해 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느님께서는 결과를 아시면서도 “피조물이 허무한 것에 복종하게” 하셨다. 하지만 그분은 “자손”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희망을 근거로 그렇게 하셨다. (창 3:15; 22:18; 갈 3:16) 하느님께서 주신 그 확실한 희망은 충실한 자들이 결국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다.—롬 8:21.

썩어짐의 종살이: “썩어짐”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부패; 약화; 멸망”을 의미한다. 이 “썩어짐의 종살이”는 죄의 결과로서, 신체적 불완전성, 노화, 질병, 죽음을 초래한다. 완전한 인간의 몸도 썩을 수 있다. 바울이 예수에 관해 한 말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시켜 다시는 썩지 않게 하셨다”고, 다시 말해 그분이 썩을 수 있는 인간의 몸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게 하셨다고 말했다. (행 13:34) 그와 마찬가지로 완전했던 아담도 썩을 수 있는 몸, 즉 죽을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느님께 순종했다면 아담은 영원히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담이 썩어짐의 종살이를 하게 되고 그 나쁜 영향에 굴복하게 된 것은 그가 죄를 지었을 때였다. 그는 이 종살이를 그의 모든 자손 즉 인류에게 물려주었다. (롬 5:12)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은 그러한 종살이에서 풀려나 마침내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이다. (눅 3:38) 여호와께서는 “영을 위해 뿌리는 사람”에게 그러한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하지만 “육체를 위해 뿌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어 없어질 것을 거둘” 것이며 그러한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갈 6:8.

아들로 입양되게 하는: 직역하면 “아들로 두게 하는”. 그리스어 휘오테시아. 그리스와 로마 세계에서는 “입양”이라는 개념이 잘 알려져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입양되는 사람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청소년이나 젊은 성인이었다. 일부 주인들은 종을 법적으로 입양하기 위해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었다고 한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였다. 바울은 입양의 개념을 사용해서, 하느님의 부르심과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갖게 되는 새로운 신분을 설명한다. 불완전한 아담의 후손 모두는 죄의 종이었으므로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질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의 대속 희생으로 인해 여호와께서 그들을 죄의 종 상태에서 해방시켜 아들로 입양하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로 삼으실 수 있게 되었다. (롬 8:14-17; 갈 4:1-7) 바울은 그처럼 입양된 자들과 여호와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아바, 아버지!”라고 외친다고 말한다. 종이 주인을 그처럼 친근한 표현으로 부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아바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누구를 아들로 입양할지 결정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 (엡 1:5) 그분은 그들을 영으로 기름부으시는 때부터 자신의 자녀로 인정하신다. (요 1:12, 13; 요1 3:1) 하지만 하늘 생명으로 부활되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가 되는 영예로운 일이 온전히 실현되려면, 그들은 지상에 사는 동안 충실을 증명해야 한다. (계 20:6; 21:7) 따라서 바울은 그들이 “대속물에 의해 우리 몸에서 놓여 아들로 입양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롬 8:23.

아들로 입양되기를: 롬 8:15 연구 노트 참조.

그 영이 뜻하는 바: 또는 “그 영의 정신(생각)”. 여기서 “영”은 하느님의 영 즉 활동력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영을 사용해 성경 필자들이 성경에 나오는 생각들을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 영감받은 생각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신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바울은 하느님께서 마음을 살피시는 분으로서, 지상에 있는 자신의 종들이 너무 괴로워서 기도로 무엇을 청해야 할지 모를 때 성경에 나오는 어떤 생각들이 그들의 심정을 잘 대변해 주는지도 아신다고 알려 준다. 그것은 마치 영으로 영감받은 그 내용이 하느님의 거룩한 자들을 위해 탄원하는 즉 중재하는 것과 같다. (롬 8:26) “영”에 해당하는 단어를 “정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나 “탄원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와 함께 사용한 것은 성경에서 하느님의 영을 의인화한 또 다른 예이다.—요 14:16 연구 노트 참조.

우리를 대신하여 바로 그 영이 탄원해 줍니다: 때때로 하느님의 종들이 기도로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르”거나 자신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있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이나 마음속의 신음이나 생각을 말로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신음하는 것을 성령이 대신 탄원하게 즉 중재하게 하신다. 이러한 탄원은 하느님의 영으로 영감받은 말씀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느끼는 감정과 그들이 겪는 상황은 하느님의 말씀에 기록된 영감받은 기도와 사건들에 이미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신음할” 때,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말씀에 들어 있는 그러한 영감받은 생각들을 자신의 종들이 하는 말로 여기시고 자신의 뜻에 따라 응답하신다.—시 65:2. 롬 8:27 연구 노트 참조.

돕는 자: 또는 “위로자; 격려하는 자; 변호하는 자”. “돕는 자”로 번역된 그리스어(파라클레토스)는 성경에서 성령의 역할(요 14:16, 26; 15:26; 16:7)과 예수의 역할(요1 2:1)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부름을 받아 누군가의 곁으로 가서” 도움을 베푸는 자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비인격적인 힘인 성령을 돕는 자로 언급하시면서, 이 돕는 자가 “가르치고”, ‘증언하고’, ‘증거를 제시하고’, ‘인도하고’, ‘말하고’, ‘듣고’,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 14:26; 15:26; 16:7-15) 그분은 인격체가 아니거나 생명이 없는 것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의인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의인법이 사용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혜, 죽음, 죄, 과분한 친절에 대해 묘사할 때 의인법이 사용되었다. (마 11:19; 눅 7:35; 롬 5:14, 17, 21; 6:12; 7:8-11) 그중 어느 것도 인격체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하느님의 영이 비인격적인 힘이나 사물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그 영이 인격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마 3:11; 행 6:3, 5; 13:52; 고후 6:4-8; 엡 5:18) 일부 사람들은 이 “돕는 자”를 지칭할 때 그리스어 남성형 대명사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성령이 인격체라고 주장한다. (요 14:26) 하지만 “돕는 자”에 해당하는 단어가 남성형이므로 “돕는 자”가 하는 일을 묘사할 때 그리스어 문법에 따라 남성형 대명사가 사용되어야 한다. (요 16:7, 8, 13, 14) 그런가 하면 “영”(프뉴마)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중성이므로, “영”을 지칭할 때는 중성형 대명사가 사용된다.—요 14:17 연구 노트 참조.

그 영이 뜻하는 바: 또는 “그 영의 정신(생각)”. 여기서 “영”은 하느님의 영 즉 활동력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영을 사용해 성경 필자들이 성경에 나오는 생각들을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 영감받은 생각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신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바울은 하느님께서 마음을 살피시는 분으로서, 지상에 있는 자신의 종들이 너무 괴로워서 기도로 무엇을 청해야 할지 모를 때 성경에 나오는 어떤 생각들이 그들의 심정을 잘 대변해 주는지도 아신다고 알려 준다. 그것은 마치 영으로 영감받은 그 내용이 하느님의 거룩한 자들을 위해 탄원하는 즉 중재하는 것과 같다. (롬 8:26) “영”에 해당하는 단어를 “정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나 “탄원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와 함께 사용한 것은 성경에서 하느님의 영을 의인화한 또 다른 예이다.—요 14:16 연구 노트 참조.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여기서 “목적”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프로테시스는 문자적으로 “앞에 놓아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롬 9:11(“뜻”); 엡 1:11; 3:11에도 나온다. 하느님의 목적은 모두 틀림없이 성취되므로, 그분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아시고 예언하실 수 있다. (사 46:10) 예를 들어 여호와께서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집단이 있을 것임을 미리 아셨다. 하지만 그분은 이 집단을 구성할 개개인을 미리 정해 두지는 않으신다. 또한 그분은 자신의 목적이 반드시 성취되도록 행동을 취하신다.—사 14:24-27.

예수께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스데반은 예수께서 시 110:1에 예언된 대로 하늘에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처음으로 증언한 사람이었다. 오른편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상징했다. 통치자의 오른편에 있다는 것은 통치자 다음으로 중요한 지위에 있거나 (롬 8:34; 벧전 3:22) 통치자의 호의를 누리는 지위에 있다는 의미였다.—마 25:33; 막 10:37; 눅 22:69 연구 노트 참조.

권능의 오른편: 통치자의 오른편에 있다는 것은 통치자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의미였다. (시 110:1; 행 7:55, 56) “권능”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이 문맥에서 하느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권능을 가진 분” 또는 “강력한 분”으로 번역할 수 있다. “권능의 오른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은 평행 성구인 눅 22:69에도 나오는데 그 구절에서는 “하느님”이라는 단어와 함께 나온다. 따라서 “하느님의 권능의 오른편”으로 번역되었다. 또한 “권능의 오른편”이라는 말에는 예수께서 권능을 가진 분인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기 때문에 권능 즉 권위를 받게 되실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을 수 있다.

다시 일으켜지셔서: 일부 사본에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켜지셔서”로 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본문의 표현이 사본상으로 더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다.

하느님의 오른편에: 통치자의 오른편에 있다는 것은 통치자 다음으로 중요한 지위에 있거나 (시 110:1; 벧전 3:22) 통치자의 호의를 누리는 지위에 있다는 의미였다.—마 26:64; 행 7:55 연구 노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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