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1:1-16

1  하느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이 편지합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진리의 정확한 지식에 따라 사도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경건한 정성과 일치한 것이며 2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느님께서+ 오래전에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한 것입니다. 3  정하신 때에 그분은 전파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알리셨는데, 그 일은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나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4  나는 같은 믿음에 따라 진실한 아들이 된 디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오는 과분한 친절과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5  내가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것은 내가 지시한 대로 결함이 있는 것들을 바로잡고 도시마다 장로들을 임명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6  장로는 비난받을 일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고, 방탕하다거나 반항적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는 믿는 자녀를 둔 사람이어야 합니다.+ 7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감독자는 비난받을 일이 없고,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고,+ 쉽게 화를 내지 않고,+ 술 취하는 자가 아니고, 폭력적이지 않고,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않고,+ 8  후대를 잘하고,+ 선한 것을 사랑하고, 정신이 건전하고,+ 의롭고, 충성스럽고,+ 자제력이 있고,+ 9  가르치는 기술을 사용할 때 신실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는 건전한* 가르침으로+ 격려하고, 거슬러 말하는 사람들을 책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  반역적인 사람, 무익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 속이는 사람이 많은데, 특히 할례에 고착하는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11  그들이 입을 다물게 해야 합니다. 그들은 부정한 이득을 얻으려고+ 가르쳐서는 안 될 것들을 가르쳐 여러 집안을 온통 망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  그들 중의 한 사람 곧 그들의 예언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레타 사람은 언제나 거짓말쟁이이고 사나운 짐승이고 게으른 탐식가이다.” 13  이 증언은 참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계속 엄하게 책망하여,+ 그들이 믿음에서 건전해지고 14  유대인의 설화에나+ 진리를 저버리는 사람들의 명령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하십시오. 15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더럽혀지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깨끗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그들은 정신과 양심이 모두 더럽혀져 있습니다.+ 16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공언하지만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합니다.+ 그들이 가증스럽고 불순종하며 어떤 선한 일에도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주

또는 “유익한”.

연구 노트

디도서: 이 편지의 원문에는 이러한 제목이 없었던 것 같다. 고대 사본들을 보면 이러한 제목이 나중에 붙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성경의 책들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기원 4세기에 만들어진 잘 알려진 사본인 시나이 책자본에는 이 편지의 끝에 “디도에게”라는 제목이 들어 있다. 다른 초기 사본들에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제목이 들어 있다.

참하느님의 종이 되었고: 또는 “참하느님을 섬기게 되었고”. 여기서 “종이 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다른 사람들, 주로 한 명의 주인을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온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행 4:29; 롬 6:22; 12:11) 바울은 “살아 계신 참하느님의 종”이 되면 생명 없는 우상이나 인간이나 죄의 종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롬 6:6; 고전 7:23. 마 6:24; 롬 1:1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 예수의 종: 일반적으로 “종”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둘로스는 남의 소유가 된 사람, 많은 경우 남에게 팔려 종이 된 사람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마 8:9; 10:24, 25; 13:27) 또한 이 단어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한 종을 가리키기도 한다. (행 2:18; 4:29; 갈 1:10; 계 19:10) 예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대속 희생으로 바치심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사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더는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며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으로 여긴다. (엡 6:6; 고전 6:19, 20; 7:23; 갈 3:13)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영감받은 편지의 필자들은 모두 회중들에게 교훈을 베풀 때 적어도 한 번 이상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임을 언급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주이자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한다는 것을 나타냈다.—롬 1:1; 갈 1:10; 약 1:1; 벧후 1:1; 유 1; 계 1:1.

저는 여호와의 여종입니다!: 마리아는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여호와의 다른 종들이 한 말과 비슷한 말을 한 것이다. 예를 들면, 삼상 1:11에 기록된 한나의 기도에는 “만군의 여호와여, 이 종[또는 “당신의 여종”]의 괴로움을 보시고”라는 말이 들어 있다. 「칠십인역」삼상 1:11을 번역할 때, 누가복음에서 “여종”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와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다.—부록 다3 소개; 눅 1:38 참조.

사도: 그리스어 명사 아포스톨로스는 “보내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포스텔로에서 나온 단어이다. (마 10:5; 눅 11:49; 14:32) 요 13:16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에 이 단어의 기본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그 구절에서는 이 단어가 “보냄을 받은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다. 바울은 부활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택에 의해 이방 사람들 즉 비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행 9:1-22; 22:6-21; 26:12-23) 바울은 자신이 부활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고전 9:1, 2) 기적을 행했다는 (고후 12:12) 점을 들어 자신의 사도직을 확증했다. 또한 침례받은 신자들에게 성령이 내려질 때 그가 통로 역할을 했다는 점 역시 그가 진정한 사도라는 증거였다. (행 19:5, 6)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점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자신을 “열두 제자” 가운데 포함시킨 적은 한 번도 없다.—고전 15:5, 8-10; 롬 11:13; 갈 2:6-9; 딤후 1:1, 11.

여러분 모두: 이 편지는 바울이 디도에게 쓴 것이지만 이 표현을 볼 때 바울은 회중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편지를 읽어 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이 편지의 내용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디도가 시정을 베풀고 (딛 1:5, 10) 장로를 임명하고 (딛 1:6-9) 책망을 하고 (딛 1:13; 2:15) 자주 일깨워 주고 (딛 3:1, 8)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물질적 지원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할 때 (딛 3:13, 14) 그에게 협조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바울이 편지합니다: 원문에는 “~이 편지합니다”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다. 7절까지 이어지는 이 편지의 서두는 고대의 일반적인 편지 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개 편지를 쓰는 사람이 언급되고 그다음에는 편지를 받는 사람이 언급되며 이어서 일반적인 인사말이 나온다. (롬 1:7) 바울은 서두에서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일과 자신이 전하는 소식에 대해 설명하는데, 이러한 서두는 당시의 일반적인 편지글에 비교해 볼 때 상당히 긴 편이다. (그리스어로는 1절부터 7절까지가 한 문장이다.) 일부 학자들은 로마 회중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바울이 그 회중을 아직 방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서두를 길게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 15:23; 23:26 연구 노트 비교) 바울은 성경에 처음 언급될 때는 히브리식 이름 사울로 불리지만 행 13:9 이후로는 로마식 이름(파울로스, 당시 흔히 사용되던 라틴어 이름 파울루스의 그리스어 형태)으로 불린다. 그는 히브리서를 제외한 모든 편지에서 자신을 바울로 언급하며, 히브리서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비유대인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라는 임명을 받은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진 사도”였으므로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롬 11:13; 행 9:15; 갈 2:7, 8. 행 7:58; 13:9 연구 노트 참조.

정확한 지식: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지식”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그노시스에피그노시스이다. 여기 사용된 에피그노시스그노시스의 강조형(에피는 문자적으로 “위에”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부가적인”이라는 의미)이다. 에피그노시스는 문맥에 따라 흔히 “정확한, 참된, 온전한 지식”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롬 10: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온전한 지식을 얻는 면에서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일치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 준다.—고전 1:24, 30; 엡 3:18; 골 2:2, 3; 벧후 1:8; 2:20.

경건한 정성: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유세베이아)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나타내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숭상심과 경외심을 가리킨다. 의미 폭이 넓은 이 단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행동을 하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하느님에 대한 충성스러운 사랑이나 개인적인 애착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의 의미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신 대로 생활하다”라는 말로 요약한다. 또한 바울의 말을 보면 경건한 정성이 타고나는 특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디모데에게 이 특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운동선수가 훈련하듯이 열심히 노력하라고 권고한다. 3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건한 정성을 나타내는 면에서 최고의 본을 남기셨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딤전 3:16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의 종: 종은 사회에서 신분이 가장 낮은 계층이지만 “하느님의 종”이라는 말은 사람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표현이 아니다. (살전 1:9 연구 노트 참조) 사실, 충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바울은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의 비천한 종이 되는 것을 영예로 여겼다. (롬 1:1 연구 노트 참조) 그와 비슷하게 예수의 이부동생 야고보도 자신이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했다. (약 1:1. 벧전 2:16; 계 7:3 비교) 마리아도 여호와의 천사를 통해 임무를 받았을 때 “저는 여호와의 여종입니다!”라고 말했다.—눅 1:38 연구 노트 참조.

사도: 롬 1:1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이 편지합니다: 원문에는 “~이 편지합니다”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다. 4절까지 이어지는 이 편지의 서두는 고대의 일반적인 편지 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개 편지를 쓰는 사람이 언급되고 그다음에는 편지를 받는 사람이 언급되며 이어서 인사말이 나온다. (딛 1:4) 디도서의 서두는 상당히 긴 편이다. (그리스어로는 1절부터 4절까지가 한 문장이다.) 바울은 자신의 이름을 밝힐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도라는 점과 자신이 수행하는 전파 활동에 대해 설명한다. 이 편지가 동료인 디도에게 개인적으로 보내는 편지인데도 바울이 서두를 일반적인 편지보다 더 길게 격식을 갖추어 쓴 것은 다른 사람들도 이 편지를 읽기를 바랐기 때문일 수 있다.—딛 3:15 연구 노트 참조. 롬 1:1 연구 노트 비교.

진리의 정확한 지식: 여기서 바울은 정확한 지식을 경건한 정성과 희망과 연관 짓는다.—딛 1:2; 2:11, 12. 이 구절에서 “정확한 지식”으로 번역된 그리스어에 대해 알아보려면 엡 4:13 연구 노트 참조.

경건한 정성: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오래전에: 예수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한 집단의 사람들이 아들 예수와 함께 하늘 왕국에서 다스리게 하시려는 여호와의 목적은 창 3:15의 예언과 관련이 있었다. (갈 3:16, 29) 여호와께서는 아담이 죄를 지은 직후에 그 목적을 밝히셨는데, 그때는 바울이 이 편지를 쓰기 수천 년 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과분한 친절이 “오래전에” 베풀어졌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일부 번역판에서는 이 표현을 “영원 전에”라고 번역하는데, 그러한 번역 표현은 바울이 언급한 일들이 영원 전에 미리 결정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한 사전에서는 “오래전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이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간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롬 16:25 비교. 롬 8:28 연구 노트 비교) 하느님께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오래전에 예언하시는 분이며, 그분의 목적은 반드시 이루어진다.—사 46:10; 엡 1:4.

영원한 목적: 이 문맥에서 “목적”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달성할 수 있는 특정한 목표를 가리킨다. 이 표현은 에덴에서 반역이 있었는데도 인류와 땅에 대해 자신이 원래 뜻한 바를 이루시려는 여호와의 의지와 관련이 있다. (창 1:28) 반역이 있은 직후에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와 관련해 이 목적을 세우셨다. 그분은 반역자들이 초래한 해를 바로잡을 “자손”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셨다. (창 3:15; 히 2:14-17; 요1 3:8) 이 목적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영원한 목적”(직역하면 “시대들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1) “영원하신 왕[직역하면 “시대들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딤전 1:17) 그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데 여러 시대가 걸리도록 허용하셨기 때문이다. (2) 그 목적이 이루어진 결과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28 연구 노트 참조.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느님: 거짓말하는 것은 “진리의 하느님 여호와”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시 31:5) 여호와께서는 모든 일을 성령을 통해 하시는데, 예수께서는 성령을 가리켜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다. (요 15:26; 16:13) 이 면에서 여호와께서는 불완전한 인간과 완전히 다르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고 성경에서는 알려 준다. (민 23:19) 또한 여호와께서는 사탄과도 완전히 다르시다. 그는 “거짓말쟁이이고 거짓의 아버지”이다. (요 8:44)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결코 거짓말하실 수 없으므로 그분의 약속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히 6:18.

오래전에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희망: 여기서 바울은 하느님께서 이 희망을 “오래전에” 약속하셨다고 말한다. (딤후 1:9 연구 노트 비교) 바울은 여호와께서 사람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목적을 처음으로 세우신 때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일 수 있다. 또는 여호와께서 사람에 대한 목적을 처음으로 밝히신 때를 가리켜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창 1:27, 28; 2:17) 하느님께서 에덴에서 반역한 자들에게 선고를 내리실 때에도 그분의 원래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시 37:29) 하지만 그때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자손”이 사탄을 짓밟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나중에 기록된 성경의 내용을 보면 그 “자손”에는 하늘에서 영원히 살 사람들이 포함될 것이었다. (창 3:15. 단 7:13, 14, 27; 눅 22:28-30 비교) 바울을 비롯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갖고 있었다.—엡 3:11 연구 노트 참조.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바울이 기록한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에는 “구원자”라는 표현이 여호와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여섯 번 사용되었다. (이 구절과 딤전 2:3; 4:10; 딛 1:3; 2:10; 3:4) 이것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표현이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은 것과 대비가 된다. (눅 1:47; 유 25)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주 언급한다. (시 106:8, 10, 21; 사 43:3, 11; 45:15, 21; 렘 14:8) 여호와께서 예수를 통해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때문에, 예수도 “구원자”로 언급된다. (행 5:31; 딤후 1:10) 예수는 “구원의 수석 대표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히 2:10) 천사는 하느님의 아들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를 의미하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부르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가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오.” (마 1:21연구 노트) 따라서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근원이 여호와이시라는 점을 강조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구원자로 언급한다. (딛 2:11-13; 3:4-6) “구원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칠십인역」에서 그 단어를 번역하는 데 사용된 그리스어는 하느님의 백성을 적들로부터 “구할 구원자들”로 일으켜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된다.—느 9:27; 삿 3:9, 15.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 딤전 1:1 연구 노트 참조.

진정한 아들: 바울은 이러한 애정이 담긴 말을 사용하여,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따뜻한 감정을 표현한다. 성경은 바울이 디모데와 그의 가족에게 좋은 소식을 처음으로 전했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하지만 디모데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바울의 여행 동료가 되었다. (행 16:1-4)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 편지를 쓸 당시 디모데를 자신의 믿음 안의 아들 즉 영적 아들로 여겼다. (딛 1:4 비교) 두 사람 간의 그런 특별한 관계는 1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었다.—고전 4:17; 빌 2:20-22.

디도는 …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안티오크에서 할례에 관한 논쟁이 일어났을 때 (기원 49년경) 디도도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 (행 15:1, 2; 갈 2:1) 디도는 “그리스인” 즉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이 구절에 나오는 그리스인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2절에 나오는 “크게 존경받는 형제들”은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구절 즉 3절에서 “강요하다”라는 동사가 사용된 것을 볼 때 일부 유대교 복귀주의자들 즉 유대교 신앙과 관습을 옹호하던 사람들이 디도에게 할례를 받도록 압력을 가했을 수 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모임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다. (행 15:23-29) 여기서 바울이 디도의 경우를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모세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디도는 주로 할례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전파 활동을 했으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고후 8:6; 딤후 4:10; 딛 1:4, 5) 따라서 그의 경우는 바울이 할례를 베풀었던 디모데의 경우와는 달랐다.—행 16:3 연구 노트 참조.

디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내 영이 편치 못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을 때 고린도 전서를 썼다. 그 편지에는 매우 강력하게 충고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 후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로 보내 유대의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 모금하는 일을 하게 했다. (고후 8:1-6) 그는 나중에 트로아스에서 디도를 만나기를 원했지만 그곳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영이 편치 못했다’고 말했다. 바울이 그렇게 느꼈던 것은 그의 강력한 충고가 담긴 편지를 고린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디도에게서 듣지 못해 실망했기 때문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솔직하게 알려 줌으로, 그가 그들에게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나타냈다. 바울은 트로아스에서 “마케도니아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디도를 만나 좋은 보고를 들었다. 그는 회중이 자신의 충고를 잘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안심하고 기뻐했다.—고후 7:5-7. 고후 7:5 연구 노트 참조.

달마티아: 발칸반도에서 아드리아해 동쪽에 위치한 지역. 이 이름은 로마 속주 일리리쿰의 남쪽 지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무렵에는 달마티아가 별도의 속주가 되어 있었다. (부록 나13 참조) 바울은 “일리리쿰에 이르기까지” 전파했기 때문에 달마티아를 지나갔을 수 있다. (롬 15:19연구 노트) 그는 크레타에 있던 디도에게 니코폴리스로 와 달라고 했는데, 여기서 니코폴리스는 현대 그리스 북서쪽 해안에 있는 니코폴리스를 가리키는 것 같다. (딛 3:12) 따라서 디도는 바울과 함께 니코폴리스에 있다가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달마티아로 갔을 수 있다. 그곳에서 디도는 크레타에서 했던 것처럼 선교 활동을 하면서 회중과 관련된 일들을 조직했을 것이다.—딛 1:5.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바울이 기록한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에는 “구원자”라는 표현이 여호와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여섯 번 사용되었다. (이 구절과 딤전 2:3; 4:10; 딛 1:3; 2:10; 3:4) 이것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표현이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은 것과 대비가 된다. (눅 1:47; 유 25)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주 언급한다. (시 106:8, 10, 21; 사 43:3, 11; 45:15, 21; 렘 14:8) 여호와께서 예수를 통해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때문에, 예수도 “구원자”로 언급된다. (행 5:31; 딤후 1:10) 예수는 “구원의 수석 대표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히 2:10) 천사는 하느님의 아들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를 의미하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부르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가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오.” (마 1:21연구 노트) 따라서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근원이 여호와이시라는 점을 강조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구원자로 언급한다. (딛 2:11-13; 3:4-6) “구원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칠십인역」에서 그 단어를 번역하는 데 사용된 그리스어는 하느님의 백성을 적들로부터 “구할 구원자들”로 일으켜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된다.—느 9:27; 삿 3:9, 15.

과분한 친절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들 가운데 11통의 편지에서 이러한 인사말을 사용한다.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딛 1:4; 몬 3) 그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들에서도 매우 비슷한 인사말을 사용했지만 그 인사말에는 “자비”라는 특성이 함께 언급되어 있다. (딤전 1:2; 딤후 1:2) 학자들은 바울이 일반적으로 인사말로 사용되는 단어(“안부를 전합니다!”, 카이레인)가 아니라 그와 발음이 비슷한 다른 그리스어 단어(카리스)를 자주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들은 바울이 그렇게 함으로 회중들이 “과분한 친절”을 온전히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 15:23 연구 노트 참조) “평화”를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이 인사할 때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샬롬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막 5:34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과분한 친절과 평화”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대속을 통해 여호와 하느님과 누리게 된 관계를 강조한 것 같다. 바울은 관대한 친절과 평화의 근원으로 하느님 우리 아버지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분하여 언급한다.

진실한 아들: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들에서 디도와 디모데에게만 이러한 애정이 담긴 표현을 사용했다. (딤전 1:2[“진정한 아들”] 및 연구 노트) 어쩌면 바울이 디도에게 처음으로 좋은 소식을 직접 알려 주었을 수 있다.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 그는 디도를 영적 아들로 여겼다. 두 사람 사이의 특별한 관계는 회중들을 위해 봉사의 직무를 함께 수행하면서 형성되었다. (고후 8:23) 바울이 이 편지를 쓴 시점은 두 사람이 적어도 12년간 알고 지낸 때였다.

디도: 사도 바울과 협력하여 함께 일한 그리스인 그리스도인. 기원 49년경에 바울은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할례 문제에 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행 15:1, 2; 갈 2:3연구 노트) 몇 년 뒤 (기원 55년경)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로 보내 유대의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구호 기금을 모으는 일을 하게 했다. 바울이 디도를 보낸 데에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보낸 첫 번째 편지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아보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디도의 좋은 보고를 듣고 안심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를 썼으며, 디도가 그 편지를 전달한 것 같다. (고후 2:13연구 노트; 고후 7:6, 7, 13-16; 8:1-6, 16, 17, 23; 12:17, 18) 아마도 기원 61년에서 64년 사이에, 바울은 디도를 크레타에 남겨 두어 “결함이 있는 것들을 바로잡고 … 장로들을 임명하게” 했다. (딛 1:5) 나중에 바울은 디도에게 자신을 만나러 니코폴리스로 오라고 말했다. (딛 3:12) 바울이 로마에 두 번째로 투옥되어 있을 때 (기원 65년경) 디도는 달마티아로 갔다. (딤후 4:10 연구 노트 참조) 그는 바울의 승인을 받아 그렇게 했을 것이며, 어쩌면 바울이 그렇게 하도록 지시했을 수도 있다. 분명 디도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자신이 섬긴 회중들에 큰 도움을 주었고 바울을 훌륭하게 지원했다.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 앞 구절에서 바울은 하느님을 “우리 구원자”라고 했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은 예수와 하느님이 동일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로 언급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해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때문에 예수도 “우리 구원자”라고 할 수 있다. 히 2:10에서 바울은 예수를 “구원의 수석 대표자”라고 부른다. 성경 필자인 유다는 여호와를 “유일하신 우리의 구원자 하느님”으로 언급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함으로,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서 협력하여 일하신다는 점을 보여 준다. (유 25) 따라서 바울이 한 말은 “그리스도 예수”와 “하느님 아버지”가 동일한 분이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다.—딤전 1:1 연구 노트 참조.

과분한 친절과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롬 1:7 연구 노트 참조.

임명하고: 이 구절에서는 여행하는 감독자들인 바울과 바나바가 장로들을 임명했다고 알려 준다. 그들이 장로들을 임명할 때 단식하며 기도를 드린 것을 보면 그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디도도 회중의 “장로들”을 임명하는 일을 했다. 디모데도 그러한 일을 한 것 같다. (딛 1:5; 딤전 5:22) 이 구절에서 “임명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케이로토네오는 문자적으로 “손을 내밀다(뻗다; 들다)”를 의미한다. 이 점을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당시 회중에서 장로들을 거수로 선출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그리스어 단어가 반드시 그러한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더 일반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유대 고대사」 6권 4장 13항(로브 6:54 및 6:312)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방식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느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임명하신 일을 언급할 때 이 그리스어 동사를 사용했다. 사울은 이스라엘 회중의 거수를 통해 왕이 된 것이 아니었다. 성경은 예언자 사무엘이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이렇게 말했다고 알려 준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어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울을 임명하신 것이었다. (삼상 10:1) 또한 행 14:23의 그리스어 문법 구조를 보면 장로들을 임명한(직역하면 “손을 뻗은”) 것은 회중이 아니라 사도들인 바울과 바나바였다. 1세기 회중에서 사도들을 비롯한 권한을 가진 형제들이 자격 있는 남자들을 책임 있는 위치에 임명할 때 문자적으로 손을 얹는 경우도 있었다. 손을 얹는 것에는 확증하거나 승인하거나 임명한다는 의미가 있었다.—행 6:6 연구 노트 비교.

크레타: 지중해에서 비교적 큰 편에 속하는 섬인 크레타는 에게해의 남쪽 끝에 있으며 그리스 본토에서 남동쪽으로 10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다. 이 섬은 길이가 약 250킬로미터이고 폭은 최대 56킬로미터이다. 사도 바울은 첫 번째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가는 길에 이 섬을 지나갔다. (행 27:7-9, 12, 13, 21) 바울은 로마에서 첫 번째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크레타에 다시 간 것 같은데,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바울은 크레타를 떠나면서 디도를 그곳에 남겨 두어 봉사의 직무를 계속 수행하게 했다.—부록 나13; 미디어 갤러리 “사도행전—로마로 가는 바울의 여정과 첫 번째 투옥”; “기원 61년경 이후에 바울이 한 여행” 참조.

바로잡고: 바울은 크레타를 떠나면서 디도에게 어려운 임무를 맡겼다. 디도는 크레타의 회중들에서 결함이 있는 즉 부족함이 있는 것들을 바로잡아야 했다. 이 편지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회중들에는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 많았다. 바울은 편지 가운데서 협조하려고 하지 않거나 디도가 사랑으로 행사하는 권위를 약화시키려고 하거나 심지어 분파를 조장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교훈했다.—딛 1:9; 2:15; 3:10, 11.

도시마다: 고대에 크레타는 도시가 많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바울이 활동하기 여러 세기 전에 그리스의 작가인 호메로스는 자신이 쓴 시에서 “백 개의 도시가 있는 크레타”를 언급했다. (「일리아드」, II, 649) 기원 1세기 당시에 이 섬에 도시가 정확히 몇 개나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바울이 “도시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데는 디도가 섬 전체를 두루 다니면서, 회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고 돌볼 장로들을 임명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딛 1:6-9.

장로들을 임명하게: 이 표현을 볼 때 바울이 디도에게 각 회중에서 인도하는 일을 할 남자들을 임명하라고 지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히 13:7, 17) 그리스도인 남자가 장로로 임명되려면 바울이 여호와의 영감을 받아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언급한 자격 조건에 달해야 했다. (딛 1:6-9. 또한 딤전 3:1-7 참조) 디도뿐만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 같은 다른 여행하는 감독자들도 여러 회중에서 장로를 임명할 권한이 있었다. 디모데도 그러한 일을 했던 것 같다.—행 14:23 연구 노트 참조.

책잡힐 것이 없고: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는 “비난받을 것이 없고” 또는 “비판받을 것이 없고”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감독자가 완전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정당한 비난을 할 수 없어야 한다. 그의 행실과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과 생활 방식에는 비난받을 것이 없어야 한다. 그는 매우 높은 도덕 표준을 따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고후 6:3, 4; 딛 1:6, 7) 일부 학자들은 감독자로 임명되는 그리스도인 남자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자격 조건을 이 표현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아내의 남편이고: 예수께서는 이미 일부일처라는 여호와의 원래 표준을 회복시키셨다. (마 19:4-6) 따라서 일부다처가 모세 율법에서 허용되고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었지만 그리스도인 감독자는 여러 아내를 두어서는 안 되었다. 또한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혼을 하고 재혼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심지어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그러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성경적 근거 없이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마 5:32; 19:9) 이러한 표준들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것이기는 했지만, 감독자와 봉사의 종은 이 면에서 본이 되어야 했다. (딤전 3:12) 또한 결혼한 감독자는 아내에게 충실해야 하고 성적 부도덕을 저질러서는 안 되었다.—히 13:4.

방탕하게 살면서: 또는 “낭비하고(제멋대로; 무절제하게) 살면서”. 이 그리스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단어가 엡 5:18; 딛 1:6; 벧전 4:4에서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돈을 헤프게 쓰는 생활 방식도 포함할 수 있는 단어이므로, 일부 성경 번역판에서는 “흥청망청 살면서”로 번역하기도 한다.

매우 진지하게 복종하는 자녀를 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일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매우 진지하게”라는 표현은 아버지가 아니라 “자녀”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말인 것 같다. 그리스도인 자녀가 “매우 진지하게 복종한다”는 것은 순종하고 존중심을 나타내고 행실을 바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나이와 환경에 맞게 그렇게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아이들이 웃고 노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알려 준다. (눅 7:32. 전 3:4; 사 11:8 비교) 고전 13:11에서 바울은 자신이 아이였을 때 “아이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추리했다고 인정한다. 따라서 그는 아이들이 어른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화나게 하지 말고: “화나게 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분노를 일으키다”로 직역할 수 있다. 이것은 부모가 불완전해서 자기도 모르게 자녀를 화나게 할 수 있는 사소한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한 참고 문헌에 따르면 여기서 화나게 하는 것은 “부모가 자녀를 마음 내키는 대로 성급하고 거칠게 대함으로, ··· 자녀가 부모에게 반발하여 반항하고 반감을 품게 만드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골 3:21 비교.

여호와의 징계와 훈계: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자녀 양육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신 분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 영혼, 힘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해야 한다”고 교훈하면서 그들이 자녀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신 6:5-8)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그분의 종들을 징계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신 11:2; 잠 3:11, 12; 히 12:6. 이 구절에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 알아보려면 부록 다3 소개; 엡 6:4 참조.

징계: “징계”로 번역된 그리스어 파이데이아는 “아이”를 의미하는 파이스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징계”라는 말의 한 가지 부면은 자녀를 양육하는 데 필요한 것과 관련이 있다. 자녀에게는 교훈, 교육, 시정이 필요하며, 때로는 단호하면서도 사랑에 찬 방식으로 벌을 주어야 한다.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책임감 있게 살아가도록 지도하는 것, 양육하는 것, 훈련하는 것, 가르침”으로 정의한다.

훈계: 또는 “교훈; 인도; 훈련”. 직역하면 “생각을 심어 줌”.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누테시아는 “정신”을 의미하는 누스와 기본적으로 “놓다”를 의미하는 티테미가 결합된 것이다. 이 문맥에서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 아버지가 자녀가 사물에 대한 하느님의 생각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렇게 함으로 아버지는 자녀에게 여호와 하느님의 생각을 심어 주어야 한다.

분한 마음을 갖게 하지 마십시오: “분한 마음을 갖게 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화나게 하다” 또는 “들볶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은 부모가 사랑에서 우러나와 베푸는 징계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잠 13:24 비교) 그런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비합리적이거나 거칠게 대할 때 미치는 해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그처럼 자녀를 학대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균형 잡힌 방식으로 대하신 일(시 103:13; 약 5:11)이나 그분이 자신의 아들을 따뜻하게 대하신 일(마 3:17; 17:5)에 대한 성경의 내용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낙심하지: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단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일부 성경 번역판에서는 “낙담하다; 기가 꺾이다”와 같은 표현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부정적인 생각이 자녀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행복한 삶을 누리는 데 방해가 될 정도로 깊이 상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구절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모가 자녀를 거칠게 대한 결과로 자녀가 그처럼 낙심하게 될 수 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이 단어의 용법에 대해 설명한 여러 참고 문헌에 따르면, 바울이 언급한 “분한 마음을 갖게 하는” 일로 인해 자녀는 자신이 부모를 결코 기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면 상심하고 심지어 절망에 빠질 수 있다.—이 구절에 나오는 분한 마음을 갖게 하지 마십시오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비난받을 일이 없고: 디모데 전서에도 비슷한 표현들이 나온다.—딤전 3:10. 딤전 3:2 연구 노트 참조.

한 아내의 남편이고: 딤전 3:2 연구 노트 참조.

방탕하다거나: “방탕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제멋대로 행동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 단어는 대개 사치와 낭비를 일삼으며 부도덕하게 살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벧전 4:4) 이 그리스어와 어근이 같은 단어가 탕자에 관한 예수의 비유 가운데 나온다. 그는 집을 떠나 자기 재산을 매춘부에게 탕진하면서 “방탕하게” 살았다.—눅 15:13연구 노트, 30.

반항적이라는: 한 사전에서는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반항적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를 “권위에 복종하려 하지 않는, 버릇없는, 순종하지 않는”으로 정의한다. 자녀가 반항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는 그리스도인 남자는 감독자가 될 자격이 없을 것이다.

믿는 자녀를 둔: 그리스도인 남자가 장로로 섬기려면 가정을 올바로 인도하고 있어야 한다. 바울은 딤전 3:4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다.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이 구절에서 그는 장로의 자녀가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을 덧붙인다.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인 아버지가 자녀에게 믿는 사람이 되도록 강요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각자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성경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신 30:15, 16, 19) 바울의 말의 취지는 그리스도인 아버지가 장로로 자격을 갖추려면, 자녀가 믿는 사람이 되도록 돕기 위해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녀 양육에 관해 여호와께서 아버지들에게 주신 지침을 주의 깊이 따르는 사람이어야 한다.—신 6:6, 7. 엡 6:4; 골 3:21 연구 노트 참조.

관리인: 또는 “집안 관리인; 집사”.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 오이코노모스는 종의 신분이면서, 다른 종들 위에 임명된 사람을 가리킨다. 고대에는 대개 충실한 종에게 그런 직분이 주어졌으며 그에게는 주인의 일들을 관리하는 책임이 맡겨졌다. 따라서 관리인은 크게 신임받는 직분이었다. “[아브라함이] 가진 모든 것을 관리”했던 그의 종이 그러한 관리인 즉 집사였다. (창 24:2) 창 39:4에서 알려 주는 것처럼 요셉도 그러한 위치에 있었다. 예수께서 이 비유에서 사용하신 “관리인”이라는 말은 단수형으로 되어 있다. 단수형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 관리인이 특정한 사람 하나만을 가리킨다고 볼 수는 없다. 성경에는 단수 명사가 하나의 집단을 가리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여호와께서는 하나의 집단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의 증인들[복수형], 내가 선택한 나의 종[단수형]이다.” (사 43:10) 그와 마찬가지로 이 비유에서도 “관리인”은 하나의 집단을 가리킨다. 비슷한 비유가 나오는 마 24:45에서, 이 관리인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언급된다.

관리인: 또는 “집안 관리인”. “관리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오이코노모스)는 주인의 사업, 재산, 다른 종들을 포함해 집안에 대한 책임을 맡은 종을 가리킨다. 관리인은 크게 신임받는 직분이었으며 충실할 것이 기대되었다. (고전 4:2) 바울은 자신이 맡은 관리인의 직분에 “하느님의 신성한 비밀”을 잘 간수하고 그 비밀을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알려 주는 일이 포함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전 9:16. 눅 12:42 연구 노트 참조.

책잡힐 것이 없고: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는 “비난받을 것이 없고” 또는 “비판받을 것이 없고”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감독자가 완전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정당한 비난을 할 수 없어야 한다. 그의 행실과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과 생활 방식에는 비난받을 것이 없어야 한다. 그는 매우 높은 도덕 표준을 따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고후 6:3, 4; 딛 1:6, 7) 일부 학자들은 감독자로 임명되는 그리스도인 남자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자격 조건을 이 표현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합리적이고: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그리스어는 의미 폭이 넓은 단어로, 부드럽거나 사려 깊거나 관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빌 4:5 연구 노트 참조)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양보하는”을 의미한다. 하지만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의도는 감독자가 잘못에 대해 양보해야 즉 관용해야 한다거나 하느님의 표준을 타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개인의 기호가 관련된 문제에서 감독자가 다른 사람의 견해에 대해 기꺼이 양보하는 태도를 나타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감독자는 자신의 권리나 자신의 방식을 고집 세게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견해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기호를 존중하고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기꺼이 순응하려고 한다. 감독자는 성경의 법과 원칙을 확고하게 옹호하면서도, 그러한 표준을 친절하고 균형 잡힌 방식으로 적용하려고 노력한다. 합리성은 하느님의 지혜의 한 부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이다. (약 3:17. 고후 10:1 연구 노트 참조)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나타내야 하는 특성이기도 하다.—딛 3:1, 2.

폭력적이지 않고: 또는 “구타하지 않고”. “폭력적이지”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다른 사람을 때리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으며 “괴롭히는 사람”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괴롭히는 것에는 잔인하거나 악의적인 말을 하는 것도 포함되는데, 그러한 말은 실제로 때리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울 수 있다. (골 3:8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부드럽고 온화한 태도를 나타내야 한다고 교훈했다. 특히 장로들은 그러한 영감받은 표준을 따라야 한다.—딤후 2:24, 25 비교.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이 표현은 딛 1:7에도 나오는데, 한 사전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수치스러울 정도로 물질적 이득을 탐내는” 것을 가리킨다. (딤전 3:3; 벧전 5:2 비교)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여호와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며 탐욕스러운 사람은 하느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 (고전 6:9, 10; 딤전 6:9, 10) 당연히 그런 사람은 감독자나 봉사의 종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런 사람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임명받은 사람들은 회중의 기금을 관리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책임을 맡게 될 수 있다. “부정한 이득을 탐내는” 사람은 그 기금의 일부를 훔치려는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런 행동을 하게 되면 회중이 해를 입고 여호와께서도 불쾌하게 여기신다.—요 12:4-6.

돈을 사랑하지 않고: 소유물을 모으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양 떼”를 돌보는 일에 합당한 주의를 기울일 수 없다. (벧전 5:2)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의 물질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하느님의 백성이 “오는 세상 제도”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노력하도록 제대로 도울 수 없다. (눅 18:30) 또한 그 자신이 “불확실한 재물”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설득력 있게 가르칠 수 없다. (딤전 6:17) 따라서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감독자로 섬길 자격이 없다. 감독자에 대한 이 자격 조건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영감받은 교훈과 조화를 이룬다.—마 6:24; 딤전 6:10; 히 13:5.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여기서 바울은 회중의 “감독자”를 “관리인” 즉 집안 관리인으로 언급한다. “관리인”이라는 말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집안에 속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은 디모데 전서에서도 감독자의 자격 조건을 언급했는데, 그 부분에서 그리스도인 회중을 “하느님의 집안”이라고 불렀다. (딤전 3:15) 바울은 감독자를 가리켜 “하느님의 관리인”이라고 함으로, 장로의 역할이 그 집안에 속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임을 강조한다. 장로가 하는 일에는 회중 안팎에서 행해지는 가르치는 일을 인도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런 관리인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책임을 이행하는 방식에 대해 주인이신 하느님께 답변해야 한다.—눅 12:42; 고전 4:1 연구 노트 참조.

비난받을 일이 없고: 딤전 3:2 연구 노트 참조.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고: 또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거만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하는 사람은 자기 방식만을 내세운다. 그런 사람은 자기 생각을 좀처럼 바꾸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생각을 고려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협조적이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감각해질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장로로 임명되면 회중에 많은 해를 입힐 수 있다.—딤전 3:3 연구 노트 비교.

쉽게 화를 내지 않고: 또는 “짜증을 잘 내지 않고”.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은 작은 일에도 불쾌감을 드러낸다. 그런 사람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주 화를 내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많은 해를 가져온다. (잠 15:18; 22:24; 25:28; 29:22) 반면에 장로로 섬길 자격을 갖춘 사람은 “합리적이고, 다투지 않는다.” (딤전 3:3) 그는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여호와를 본받는다.—출 34:6; 시 86:15.

폭력적이지 않고: 딤전 3:3 연구 노트 참조.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바울이 동일한 그리스어를 사용한 딤전 3:8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딤전 3:3 연구 노트 참조.

후대를 잘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후대를 잘해야 한다. (히 13:1, 2; 벧전 4:9) 하지만 감독자로 임명되는 형제는 이 면에서 특히 본이 되어야 한다. (딛 1:8) “후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낯선 사람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롬 12:13 연구 노트 참조) 이 구절에서는 그 단어와 어근이 같은 형용사가 사용되어 “후대를 잘하고”로 번역되었는데, 일부 사전에서는 그 형용사를 “낯선 사람이나 방문객에게 관심을 보이는”, “손님에게 관대하게 베푸는”으로 정의한다. 한 참고 문헌에서는 후대를 잘하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 사람의 집의 문과 그의 마음의 문은 낯선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뿐 아니라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후대를 베풀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회중들을 방문하는 여행하는 대표자들에게 후대를 베풀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약 2:14-16; 요3 5-8.

선함: 선한 특성이나 상태, 도덕적 탁월함, 덕을 가리킨다. 한 사전에서는 “선함”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를 “다른 사람의 복지에 관심을 갖는 것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적극적인 도덕적 특성”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선한 행동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불완전하지만 여호와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분이 다른 이들에게 나타내시는 선함과 관대함을 본받음으로 선함을 길러 나갈 수 있다. (행 9:36, 39; 16:14, 15; 롬 7:18; 엡 5:1) 여호와께서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선하시다. (시 25:8; 슥 9:17; 막 10:18연구 노트) 그분은 참으로 관대하고 사려 깊은 하느님이시다.—행 14:17.

정신이 건전하고: 또는 “좋은 판단력이 있고; 지각력이 있고”. 한 사전에 따르면 “정신이 건전한”과 “건전한 정신”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들은 “신중한, 생각이 깊은, 자제력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정신이 건전한 사람은 균형이 잡혀 있으며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 계속 기도하기를: 여기서 바울은 회중을 대표해서 공개 기도를 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남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고전 14:34; 딤전 2:11, 12) 손을 들고라는 표현은 성경 시대 사람들이 기도할 때 흔히 취하던 자세를 묘사한 것이다. 공개 기도를 드리는 남자는 하늘을 향해 손을 든 채 하느님의 축복을 구했던 것 같다. (왕상 8:22, 23 비교) 하지만 충실한 숭배자들은 다른 자세로 기도하기도 했으며 성경에서는 특정한 자세가 더 낫다고 알려 주지 않는다. (대상 17:16; 막 11:25; 행 21:5)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드리는 사람의 마음가짐이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기도하는 사람이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충성스러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거룩한; 순결한; 성별된”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충성스럽게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다.—딛 1:8 연구 노트 비교.

자제: 여기서 “자제”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네 번 나온다. (행 24:25; 벧후 1:6) 이 특성은 “자신의 감정이나 충동이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고전 9:25에 나오는데 (연구 노트 참조) 그 구절에서 바울은 운동 경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일에서 자제를 나타냅니다.” 이 그리스어 동사는 「칠십인역」창 43:31에서 요셉이 “자신을 진정시켰다”는 표현에도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이 표현에 사용된 동사는 사 42:14에도 나오는데, 그 구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내가 … 참고 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즉각적인 조처를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악한 행로에서 돌아서서 그분의 은혜를 누릴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시간을 허용하신다.—렘 18:7-10; 벧후 3:9.

후대를 잘하고: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이 표현 앞에는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상반될 때 쓰는 접속사가 들어 있다. 바울은 지금까지는 감독자가 되기 원하는 사람이 나타내서는 안 되는 부정적인 특성들을 언급했지만 여기서부터는 감독자가 나타내야 하는 긍정적인 특성들을 언급한다. 바울의 말을 볼 때 감독자가 될 자격을 갖추려면 좋지 않은 특성들을 피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후대를 잘하는 것과 같은 좋은 특성을 길러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딤전 3:2 연구 노트 참조.

선한 것을 사랑하고: 선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여호와께서 선하다고 여기시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점을 보고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며 칭찬한다.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선한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며, 요구되는 것 이상의 일을 하기까지 한다.—마 20:4, 13-15; 행 9:36; 딤전 6:18. 갈 5:22 연구 노트 참조.

정신이 건전하고: 딤전 3:2 연구 노트 참조.

충성스럽고: 충성스러운 감독자는 여호와께 꺾을 수 없는 정성을 나타내며 하느님의 말씀에 나오는 원칙들에 충실히 고착한다. 그는 동료 숭배자들이 시련이나 박해를 겪을 때 변함없이 그들 곁을 지킨다.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는 (일부 번역판의 표현처럼) “거룩하다”, “경건하다”라는 의미도 담고 있지만, “충성스럽다”로 번역할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다. 예를 들어, 이 그리스어는 「칠십인역」에서 “충성스럽다”나 “충성스러운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를 번역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삼하 22:26; 시 18:25; 97:10) 한 참고 자료에서는 이 그리스어가 “하느님께 충성스러운 사람”을 묘사하는 말이라고 설명한다.—딤전 2:8 연구 노트 참조.

자제력이 있고: 갈 5:23 연구 노트 참조.

가르치는 기술을 다하여: 여기서 “가르치는 기술”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가르치는 방식과 내용을 모두 가리킬 수 있다. (동일한 단어가 “가르치시는 방식”으로 번역된 마 7:28 연구 노트 참조) 이 문맥에서는 가르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따라서 “가르치는 기술”로 번역되었다. 바울이 사용한 표현에는 “모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일부 번역판에서는 “온갖 교훈으로”, “모든 가르치는 기술로”, “주의 깊은 교훈으로”와 같은 번역 표현을 사용한다. 한 학자는 이 구절에 대해 설명하면서 디모데가 “그리스도교 진리를 항상 유능하게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고 말한다.—딤전 4:15, 16. 마 28:20; 딤전 3:2 연구 노트 참조.

기록된 것들에서 벗어나지 말라: 이 표현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당시에 잘 알려진 규칙이나 격언이었을 것이다. 이 표현과 일치하게, 하느님의 종들은 하느님의 영감받은 말씀에 나오는 법과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가르치거나 행해서는 안 되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성경에서 정한 한계를 벗어나서는 안 되었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특정한 사람들과 관련하여 자랑하는 덫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아볼로에 대해 심지어 바울에 대해서도 자랑했던 것 같다. 그들은 어느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면서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바울은 이 편지의 이 구절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어 성경을 여러 번 인용하는데, 아마도 기록된 것들에서 벗어나지 않는 면에서 직접 본을 보여 주려고 그렇게 한 것 같다. 그는 “기록되어 있습니다”와 같은 표현들과 함께 히브리어 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논증을 뒷받침했다.—고전 1:19, 31; 2:9; 3:19. 또한 고전 9:9; 10:7; 14:21; 15:45 참조.

가르칠 자격이 있고: 감독자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 진리와 도덕 원칙을 전해 줄 수 있는, 잘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한다. 바울은 디도서에서 감독자가 사람들을 격려하고 권고하고 책망하기 위해 “가르치는 기술을 사용할 때 신실한 말씀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딛 1:5, 7, 9연구 노트) 바울은 디모데 후서에서도 “가르칠 자격을 갖추고”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 편지에서 그는 “주의 종”은 자제를 나타내고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온화하게 교훈해야” 한다고 말한다. (딤후 2:24, 25) 따라서 감독자는 성경을 사용해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건전한 교훈을 베풀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마 28:20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그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

진리의 기둥과 버팀대: 바울은 그리스도인 회중을 묘사하기 위해 두 가지 건축 용어를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바울 시대에 많은 큰 건물에는 튼튼한 기둥들이 있었는데, 주로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는 역할을 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이나 당시 디모데가 머물고 있던 에베소의 웅장한 건물들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바울은 갈 2:9에서도 “기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연구 노트 참조) 이 구절 즉 딤전 3:15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회중 전체를 진리를 떠받치는 비유적인 기둥으로 묘사한다. “버팀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어떤 것의 견고한 기초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기초”, “지지대”, “방어벽”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은 “기둥”과 “버팀대”에 해당하는 단어를 함께 사용함으로 회중이 하느님의 말씀의 신성한 진리를 옹호하고 지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회중에서 감독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다루”어야 했다. (딤후 2:15) 바울은 이 문제를 시급한 것으로 여겨, 대배교가 일어나기 전에 디모데가 회중을 강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를 바랐다.

격려하는: 또는 “권고하는”. 그리스어 파라칼레오는 문자적으로 “곁으로 부르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폭넓은 뜻을 담고 있으며, “격려하다”(행 11:23; 14:22; 15:32; 살전 5:11; 히 10:25); “위로하다”(고후 1:4; 2:7; 7:6; 살후 2:17)를 의미할 수 있고 일부 문맥에서는 “강권하다; 권고하다”(행 2:40; 롬 15:30; 고전 1:10; 빌 4:2; 살전 5:14; 딤후 4:2; 딛 1:9, 각주)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권고와 위로와 격려가 이처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에게 권고할 때 결코 거칠거나 불친절한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려 주는 것일 수 있다.

가르치는 기술: 딤후 4:2 연구 노트 참조.

신실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장로가 가르치는 방식과 살아가는 방식에는 그가 하느님의 말씀에 고착한다는 것이 나타나야 한다. 그는 회중에서 가르칠 때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이나 연설 능력이 아니라 성경에 들어 있는 “신실한 말씀” 즉 “믿을 만한 말씀”에 의지한다. (고전 4:6연구 노트) 그렇게 하여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여호와를 사랑하고 섬기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다. (히 4:12) 또한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성경 원칙에 따라 살아감으로 위선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표준을 따르는 장로는 회중의 연합에 기여하며 “진리의 기둥과 버팀대” 역할을 한다.—딤전 3:2, 15 연구 노트 참조.

격려하고: 또는 “권고하고”.—롬 12:8 연구 노트 참조.

할례받은 그 사람들: 직역하면 “할례에서 나온 사람들”. 예루살렘 회중에서 온 몇몇 할례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다른 구절들에서는 이 그리스어 표현이 “할례를 지지하는 사람들”, “할례받은 사람들”, “할례에 고착하는 사람들”로 번역되었다.—행 11:2; 골 4:11; 딛 1:10.

반역적인 사람: 여기서 “반역적인 사람”은 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크레타의 일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따를 필요가 없는 할례에 관한 유대인의 전통과 법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들은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으며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베푼 지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익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 한 참고 자료에 따르면 이 표현은 그들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확실한 진리가 거의 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은 말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회중에 있는 약한 사람들이나 남의 말을 잘 믿는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이었다.

할례에 고착하는 사람들: 크레타의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늦어도 기원전 1세기부터는 크레타에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또한 기원 33년 오순절에 “하느님의 장엄한 일들”에 관해 들은 사람들 중에는 크레타에서 온 유대인들도 있었다. (행 2:11)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크레타의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약 12-15년 전(기원 49년경)에 예루살렘의 중앙장로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렸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다. (갈 2:1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역사적인 모임에 참석했을 때 디도도 그와 함께 갔다.—행 10:45; 15:1, 2, 7, 22-29; 갈 2:1, 3.

입을 다물게: 한 사전에 따르면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는 “부리망이나 재갈 등을 ‘입에 씌우거나 물려서’ 제어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중의 일부 사람들은 거짓 교리를 퍼뜨려 “여러 집안을 온통 망치고” 있었다. 임명받은 장로들은 그런 사람들로부터 여호와의 양 떼를 보호해야 했으며, 그들의 반역적인 말이 회중에 퍼져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함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그들이 입을 다물게” 해야 했다. 장로들은 그들을 엄하게 책망하고 필요할 경우, 반복적인 조언을 무시하고 계속 거짓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추방함으로 그들을 잠잠하게 할 수 있었다.—딛 1:9, 10, 13; 3:10, 11.

반역적인 사람: 여기서 “반역적인 사람”은 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크레타의 일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따를 필요가 없는 할례에 관한 유대인의 전통과 법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들은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으며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베푼 지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익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 한 참고 자료에 따르면 이 표현은 그들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확실한 진리가 거의 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은 말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회중에 있는 약한 사람들이나 남의 말을 잘 믿는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이었다.

욕망: 또는 “배”. 그리스어 코일리아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복부 또는 복부에 있는 위나 다른 기관들을 가리킨다. 이 구절과 빌 3:19에서는 육적인 욕망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욕망”의 종이 되는 사람은 “우리 주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빌 3:19에서는 “자기들의 배” 즉 육적인 욕망을 신으로 삼은 사람들에 대해 언급한다.

그들의 신은 자기들의 배이며: 여기서 “배”로 번역된 그리스어 코일리아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복부 또는 복부에 있는 위나 다른 기관들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는 육적인 욕망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롬 16:18 연구 노트 참조) 바울 시대에 그리스의 극장에서 상연되던 일부 연극에서는 “배의 신”을 언급했으며, 그러한 연극의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배가 “가장 위대한 신”이라고 말했다. 바울과 동시대 사람으로 라틴어로 많은 저술물을 남긴 철학자 세네카는 “배의 노예”가 된 사람을 비난했다. 바울이 빌 3:18에서 언급한 사람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것보다 자신의 육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 같다. 일부 사람들은 음식이나 술에 지나치게 탐닉하여 탐식이나 술 취함에 빠졌을지 모른다. (잠 23:20, 21. 신 21:18-21 비교)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1세기 당시 세상에서 제공하는 기회들을 추구하는 것을 여호와를 섬기는 것보다 앞자리에 두었을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여기서 바울이 음식에 관한 유대인의 규정들을 세심하게 따르는 사람들을 언급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러한 규정들을 지키는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 나머지 그들이 먹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그들의 신이 되었다.

그들의 예언자: 바울은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크레타의 시인 에피메니데스의 말을 인용한 것 같다. 여기서 “예언자”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의미 폭이 넓어서, 대변해 주거나 해설해 주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실제로 일부 고대 그리스의 저술가들도 에피메니데스를 예언자로 언급했으며, 시인 호메로스나 철학자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 저술가들도 있다. 분명 바울의 말은 에피메니데스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예언자라는 뜻이 아니다. (벧후 1:21) 바울은 크레타 사람들이 존경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여길 만한 인물의 말을 인용한 것뿐이다.

“크레타 사람은 언제나 거짓말쟁이이고 사나운 짐승이고 게으른 탐식가이다”: 고대에 크레타 사람들은 부정직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문자적으로 “크레타 사람처럼 행동하다[또는 “말하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가 거짓말을 하거나 속인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바울은 크레타의 충실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행동한다는 뜻으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다. (행 2:5, 11, 33) 바울은 크레타의 회중들에 해를 끼치는 일부 크레타 사람들을 가리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앞에서 그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여러 집안을 망치고 있는 “반역적인 사람, 무익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 속이는 사람”들을 언급했다. (딛 1:10 연구 노트 참조) 따라서 바울이 이 유명한 말을 인용한 것은 일부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그 말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게으른 탐식가: “탐식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식욕을 채우는 것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크레타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롬 16:18; 빌 3:19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이 표현을 인용할 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계속 식욕만을 채우려고 하는, 게으르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크레타 사람은 언제나 거짓말쟁이이고 사나운 짐승이고 게으른 탐식가이다”: 고대에 크레타 사람들은 부정직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문자적으로 “크레타 사람처럼 행동하다[또는 “말하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가 거짓말을 하거나 속인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바울은 크레타의 충실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행동한다는 뜻으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다. (행 2:5, 11, 33) 바울은 크레타의 회중들에 해를 끼치는 일부 크레타 사람들을 가리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앞에서 그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여러 집안을 망치고 있는 “반역적인 사람, 무익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 속이는 사람”들을 언급했다. (딛 1:10 연구 노트 참조) 따라서 바울이 이 유명한 말을 인용한 것은 일부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그 말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책망하여: “책망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성경에서 누군가에게 그가 잘못을 범했다는 것을 납득시킨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책망은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게 하려는 유익한 목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이다. 한 사전에서는 그 단어에 “‘바르게 하다’ 즉 ‘죄에서 떠나 회개로 향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설명한다. 책망은 교육하려는 의도로 베푸는 징계이다. 요 16:8에서는 동일한 그리스어가 “납득할 만한 증거를 … 제시하다”로 번역되었다.

책망하고: 그리스도인 감독자들에게는 “죄를 거듭 짓는 사람들”을 책망할 책임이 있다. (딤전 5:20연구 노트; 딛 1:13) 감독자들은 참을성 있게 성경을 사용하여 그들이 경건한 원칙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일깨워 주고 행실을 바로잡게 해 준다. (갈 6:1; 딤후 4:2)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시정하는 데도 성경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증언은 참됩니다: 앞 구절에서 바울은 크레타의 예언자 에피메니데스가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대해 한 말을 인용한 것 같다. 바울은 모든 크레타 사람들이 그 말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회중들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일부 사람들에 대해 디도에게 주의를 준 것인데, 그들은 에피메니데스의 말처럼 행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딛 1:12 연구 노트 참조.

그들을 계속 엄하게 책망하여: 크레타 회중들의 일부 사람들은 건전한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거슬러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가르쳐 “여러 집안을 온통 망치고” 있었다. (딛 1:9-11) 따라서 바울은 디도에게 그러한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좋지 않은 특성들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계속 책망하라’고 권고한다. 바울이 “엄하게”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해서 디도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게 혹은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사람들을 대해도 된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딤후 2:24 비교) 디도는 문제를 다룰 때 두려움 없이 결단력 있는 태도를 나타내고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지 분명히 밝혀야 했다. (딛 2:15) 그러면서도 자신의 목표를 염두에 두면서 “그들이 믿음에서 건전해지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었다. 그는 회중을 보호하고 배교가 퍼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딤전 5:20; 딤후 3:16 연구 노트 참조.

거짓 이야기: 딤후 4:4에서 바울은 “거짓 이야기”와 “진리”를 대조한다. 한 사전에서는 “거짓 이야기”로 번역된 그리스어 미토스를 “전설, 설화 … 꾸민 이야기, 신화”로 정의한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바울은 종교적 거짓말을 조장하는 꾸며 낸 전설이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소문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딛 1:14; 벧후 1:16.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거짓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고, 다시 말해 정신을 빼앗기지 말라고 교훈한다. 그러한 이야기는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며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진리에 정신을 쏟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딤후 1:13.

불경스러운 거짓 이야기들: 바울 시대에 사람들이 퍼뜨리던 “거짓 이야기들”(그리스어 미토스)은 “불경스러운” 즉 속된 것이었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표준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신성하고 건전한 진리와 상충되는 것이었다. (딤전 6:20; 딤후 1:13) 이 거짓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니라 지어낸 것이었으므로 무가치한 것이었다.—딤전 1:4 연구 노트 참조.

좋은 소식의 진리: 이 표현은 14절에도 나오는데, 하느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교 가르침 전체를 가리킨다.

설화: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미토스는 “전설, 설화 … 꾸민 이야기, 신화”로 정의할 수 있으며, 여기서는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이야기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풍부한 유산과도 같은 많은 실제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리를 저버렸으며” 거짓 이야기를 지어내 퍼뜨렸다.—딤전 1:4; 4:7 연구 노트 참조.

진리: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진리”는 그때까지 밝혀진 그리스도교 가르침 전체를 가리킨다.—갈 2:5 연구 노트 참조.

사람들의 명령: 이 표현은 사 29:13에 나오는 표현과 비슷하다. 예수께서는 이사야가 한 이 말을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적용하여 “그들이 사람의 명령을 교리로 가르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마 15:9; 막 7:7) 바울은 유대교에서 흔히 지키던, 사람이 만든 일부 제한 규정을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했을 수 있다. 거짓 선생들은 사람들이 경건한 삶을 사는 데 그러한 규정이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규정들을 지키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사실 그러한 규정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에서 건전해지는” 데 도움이 되는 “건전한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이었다.—딛 1:9, 13. 골 2:20-22; 딤전 4:3-5 비교.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늘 하느님의 표준과 일치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깨끗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무엇을 도덕적·영적으로 깨끗하다고 여기시는지, 그분의 영감받은 말씀에서 무엇을 정죄하는지 알고 있다. (막 7:21-23; 갈 5:19-21)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깨끗한 마음”과 “깨끗한 양심”을 유지할 수 있다. (딤전 1:5; 3:9; 딤후 1:3; 막 7:15) 바울이 언급한 “모든 것”이란 하느님께서 정죄하시지 않는 것들이다. 바울은 “깨끗한 사람들”을 양심이 더럽혀진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대조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깨끗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공언하지만: 크레타에 있는 회중들의 거짓 선생들은 하느님을 알고 숭배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하느님을 아는 것에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분의 길로 걷는 것이 포함된다. (시 25:4, 5; 요1 2:3, 4)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 즉 행실과 생활 방식을 통해 실제로는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그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런 위선적인 태도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었다.—잠 17:15 비교.

어떤 선한 일에도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적합하지 않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승인받지 못하다; 자격이 없다”를 의미한다. (롬 1:28; 딤후 3:8)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다”를 의미한다. 이어지는 구절들(딛 2:1–3:8)에서 바울은 하느님께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들이 어떤 선한 일들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설명한다.

미디어

디도서 소개 동영상
디도서 소개 동영상
디도가 도시마다 장로들을 임명하기 위해 여행하다
디도가 도시마다 장로들을 임명하기 위해 여행하다

디도는 바울이 지시한 대로 크레타섬에서 도시들을 여행하며 “장로들을 임명”했다. (딛 1:5) 바울은 디도를 크레타에 남겨 두어 그곳의 그리스도인 회중들에서 “결함이 있는 것들을 바로잡게”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바울은 디도에게 영감받은 편지를 썼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것은 디도에게 영적인 지침을 베풀고, 디도가 크레타의 회중들을 위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사도로서 지지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특히 이 편지는 디도가 장로를 임명할 때 고려해야 할 특성들을 알려 준다. (딛 1:6-9) 또한 이 편지는 “건전한 말”을 하고 “훌륭한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회중에서 “반역적인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베푼다.—딛 1:10, 11, 13, 14; 2:8; 3:14.

디도서의 일부가 들어 있는 파피루스 단편
디도서의 일부가 들어 있는 파피루스 단편

사진에 보이는 것은 P32로 알려진 작은 파피루스 단편이다. 이 단편의 한쪽 면에는 딛 1:11-15이 들어 있고 다른 쪽 면에는 딛 2:3-8이 들어 있다. 책자본의 낱장인 이 단편은 일반적으로 기원 2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단편은 영국 맨체스터의 존 라일랜즈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단편의 본문은 약 150년 후에 만들어진 권위 있는 그리스어 사본인 시나이 책자본과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용어 설명 “시나이 책자본” 참조.